✦

속도에서 방향으로, 성취에서 관계와 의미로

Q. 젊은 시절에는 성공과 성과가 중요한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에서 더 중요해지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박사님이 30대나 40대였을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와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30대와 40대의 저는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논문, 특허, 과제, 실적. 그때는 그것이 옳았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 시절의 몰입이 없었다면 HANA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젊을 때는 속도가 자산입니다.

다만 대가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을 저는 거의 놓쳤습니다.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실험실에 있을 때는 그게 얼마나 큰 것을 지불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중요해진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관계입니다. 사람이 남습니다. 둘째는 마음의 평정입니다. 이겨야만 견딜 수 있는 마음에서, 져도 괜찮은 마음으로 옮겨 오는 데 저는 60년이 걸렸습니다. 셋째는 의미입니다. ‘이걸 왜 하는가’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일만 하게 됩니다.

정리하면, 젊을 때는 속도가 중요하고 나이가 들면 방향이 중요합니다. 빠른 것보다 옳은 쪽으로 가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방향은 혼자 정할 수 없더군요. 결국 사람들 속에서 정해집니다.

Q. 반대로 인생 2막을 살면서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고 느낀 것도 있나요?

직함, 경쟁, 인정, 돈, 성과처럼 젊은 시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가운데 지금은 덜 중요해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첫째는 직함입니다. 저는 아직도 ‘본부장님’이라고 불리면 반사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호칭이 없어도 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결국 직함이 아니라 그 사람을 기억하더군요.

둘째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건 가장 오래 걸렸습니다. 상을 받아도 허전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남의 인정으로 채우는 그릇은 밑이 빠져 있어서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습니다.

셋째는 비교입니다. 누가 어디 자리에 갔다더라, 누구는 얼마를 받는다더라. 이 소리를 듣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넷째는 완벽주의입니다. 연구자에게 완벽주의는 미덕이었습니다. 소수점 아래까지 맞지 않으면 논문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인생 2막에서는 그것이 족쇄가 됩니다. 100점이 아니면 시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합니다. 요즘 저는 80점이면 일단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훨씬 많은 일을 하게 됐습니다. 내려놓았더니 오히려 손에 들어온 것이 많아졌습니다. 그게 자유더군요.

실패를 데이터로 바꾸는 습관

Q. 박사님께서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셨고, ‘11전 12기’라는 표현도 하셨습니다. 그 경험은 인생 2막을 살아가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나요?

연구에서의 실패와 인생에서의 실패에는 비슷한 점이 있는지, 그리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박사님만의 방식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히려 그 실패의 경험이 제 인생 2막의 밑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상황을 좀 말씀드리면, 저는 1993년 독일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곧바로 핵연료 피복관 국산화 연구 제안서를 제출했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거절당했습니다. 어렵게 연구를 시작한 뒤에는 700종이 넘는 후보 합금을 만들었고, 2만 개가 넘는 시편이 실패라는 이름으로 폐기됐습니다. 겨우 성공했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세계 최대 원자력 기업이 특허 무효 소송을 걸어왔고, 그 싸움이 7년 반 이어졌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며 배운 것은 단순합니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데이터라는 것입니다. 2만 개의 시편은 ‘2만 번 틀렸다’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2만 번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남은 길이 좁혀집니다.

인생 2막도 똑같습니다. 저도 은퇴 후에 시도했다가 잘 안된 일이 여럿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밤잠을 설쳤을 겁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 방향은 아니구나. 시편 하나 더 버렸다고 치자.” 그러고는 다음 걸 해 봅니다.

11전 12기라는 말의 핵심은 열두 번째의 성공이 아닙니다. 열한 번을 지고도 열두 번째에 다시 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 2막에서 필요한 것도 정확히 그것입니다. 능력이 아니라 다시 서는 습관이지요.

은퇴 뒤의 활동과 선택의 기준

‘포기하지 않는 한, 실패는 없다’는 메시지로 강연하는 정용환 박사.
FIG.‘포기하지 않는 한, 실패는 없다’는 메시지로 강연하는 정용환 박사. · 사진: 기사 요청자 제공

Q. 요즘 박사님의 일정을 보면 오히려 재직 당시보다 더 바쁘게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요?

강연, 과학문화 활동, 후배 멘토링, 지역 프로젝트 등 수많은 활동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지금 박사님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제 아내도 가끔 그럽니다. “퇴직한 사람 맞아요?” 저도 웃으면서 답합니다. “나도 이럴 줄 몰랐다”고요.

힘의 출처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감각입니다. 사람은 쓸모가 없어질 때 늙는 것이지,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몇 주 동안 자문한 것이 지역에 실제 예산이 되어 돌아오는 걸 보면 몸이 저절로 움직입니다.

둘째는 사람입니다. 재직 시절 제가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같은 분야의 연구자였습니다.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지자체 공무원, 기업인, 여든 넘은 선배 과학자까지 만납니다. 세상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이 만남들이 저를 계속 배우게 만듭니다.

셋째는, 조금 쑥스럽지만, 아직 가슴이 뜁니다. 아이들이 다시 ‘과학자’를 장래희망에 적어 내는 나라를 보고 싶습니다. 은퇴한 과학기술인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지역으로 흘러가는 구조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건 HANA를 개발할 때와 똑같은 종류의 설렘입니다. 저는 아직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연구 주제가 ‘지르코늄’에서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레전드 과학자 사이언스 토크쇼 현장에서 진행을 맡은 정용환 박사.
FIG.레전드 과학자 사이언스 토크쇼 현장에서 진행을 맡은 정용환 박사. · 사진: 기사 요청자 제공

Q. 인생 2막에서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까?

모든 의미 있는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박사님은 새로운 제안이나 활동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결정하시나요?

매주 있습니다. 은퇴하면 시간이 남아돌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요청이 늘면서 선택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판단 기준을 세워 두었습니다.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에 맞는 일인가? 가치관에 맞지 않으면 저는 정중히 거절합니다. 얼마 전에 강연 요청이 들어와 2시간 강연 제안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일정상 1시간만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1시간의 목적에 맞는 강사를 찾아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둘째,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인가. 다른 분이 더 잘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소개해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제 이름이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이 잘 되는 게 중요하니까요.

셋째, 내가 이 일을 끝까지 책임질 체력과 시간이 있는가. 이건 나이가 들면서 새로 생긴 기준입니다. 열정만으로 수락했다가 끝맺지 못하면 그건 도움이 아니라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과하면 하고 싶든 아니든 합니다.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거절합니다. 거절도 하나의 기여라는 것을 인생 2막에서 배웠습니다. 내가 비워 둔 자리에 더 적합한 사람이 들어가니까요.

AI 시대에 인간이 만들어야 할 가치

Q. AI 시대를 맞으며 ‘인간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앞으로 사람에게 더 중요해질 능력이나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I가 많은 일을 대신하게 되는 시대에 지식이나 기술을 넘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AI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즘 적극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제 세대에서는 드문 편일 겁니다. 강연 자료를 만들 때도, 자료를 정리할 때도 큰 도움을 받습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합니다. AI는 훌륭한 답을 줍니다. 그런데 좋은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1990년대 초, 아무도 우리나라가 피복관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던 시절에 “왜 우리는 못 하는가”라고 물었던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질문이 없었다면 아무리 좋은 AI가 있어도 HANA는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 사람에게 더 중요해질 것을 네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질문하는 힘입니다. 답이 흔해질수록 질문이 귀해집니다. 둘째, 공감입니다. 낙심한 후배 옆에 말없이 앉아 있어 주는 일은 AI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셋째, 윤리적 판단입니다. 원자력을 평생 다뤄 온 사람으로서 말씀드리면, 기술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넷째, 실패를 무릅쓰는 의지입니다. AI는 실패를 계산해서 피하지만, 사람은 실패할 줄 알면서도 뛰어듭니다. 2만 개의 시편을 버리는 일은 효율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 어리석음을 견디는 것이 사람입니다.

결국 AI 시대에 인간이 만들어야 할 가치는 ‘온기’라고 생각합니다. 계산으로는 나오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생기는 그 온도 말입니다.

Q. 지금 인생 2막을 앞두고 막막함을 느끼는 50대·60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내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박사님의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막막한 것이 정상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고, 영년직 연구원으로 선정되고, 그렇게 좋다는 것을 다 받은 사람도 퇴직 앞에서는 똑같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막막하다고 해서 자신을 준비 없는 사람이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네 가지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인생 2막의 방향을 잡는 데는 최소 2~3년이 걸립니다. 40년을 살아온 관성이 몇 달 만에 바뀔 리 없습니다. 그 기간을 ‘허송세월’이 아니라 ‘탐색기’라고 이름 붙여 주십시오. 이름을 바꾸면 견디는 힘이 생깁니다.

둘째, 자기 경험을 종이에 적어 보십시오. 자격증이나 직함 말고, 내가 무엇을 해결해 봤는지를 씁니다. 예산을 따 본 경험, 갈등을 중재해 본 경험, 아무도 안 된다던 일을 되게 만든 경험. 적어 놓고 보면 스스로 놀랍니다.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을 늘 과소평가합니다.

셋째, 아주 작게 시작하십시오. 저도 처음부터 무대에 선 것이 아닙니다. 강연 한 번, 자문 한 번부터였습니다. 작은 일이 다음 일을 데려옵니다.

넷째, 반드시 사람 속으로 나가십시오. 집에서 혼자 생각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생 2막의 기회는 거의 전부 사람을 통해 옵니다. 모임에 나가고, 연락이 끊긴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후배를 만나 밥을 사십시오. 저의 지금 활동 중에 혼자 생각해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Q. 마지막으로 박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AI 시대 행복한 인생”이란 어떤 인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거창하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세 가지가 있으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기술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기준을 갖는 것입니다. 세상이 빠를수록 사람에게는 닻이 필요합니다. 저에게 그 닻은 ‘이 일이 다음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둘째,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은 사람에게서만 위로받습니다. 저는 요즘 만나는 사람 수로 제 하루의 성적을 매깁니다.

셋째, 오늘 내가 한 선택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성취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늘 강연 하나, 오늘 자문 하나, 오늘 후배와의 밥 한 끼. 그 하루가 부끄럽지 않으면 그날은 행복한 날입니다.

돌아보면 저는 성취를 통해 행복해지려고 오래 애썼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행복했던 순간들은 대개 성취의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실험실에서 후배들과 라면을 끓여 먹던 밤, 강연장에서 어떤 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들던 순간이었습니다. AI 시대라고 해서 이 답이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레전드 과학자 사이언스 콘서트에서 시민과 청소년의 질문을 받는 모습.
FIG.레전드 과학자 사이언스 콘서트에서 시민과 청소년의 질문을 받는 모습. · 사진: 기사 요청자 제공

추가 질문|사람을 만나고, 다음 사람이 이어갈 길을 시작하다

Q. 최근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람이나 만남이 있다면요?

어느 날 원주에 사는 중학생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온라인으로 박사님 강의를 들었는데 한 번 찾아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후 학생이 대전으로 찾아와서 3시간 정도 과학적인 질문, 미래 진로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간 적이 있는데 이렇게 먼 거리에서 학생이 찾아올 때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또는 가끔 강연이 끝나고 학생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와서 “저도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을 때입니다. 그 질문을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만든 소재는 원자로 안에 있어서 아무도 볼 수 없지만, 이 아이의 표정은 제 눈앞에 있습니다.

Q. 앞으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고경력 과학기술인과 지역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상생 모델을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경상북도의 K-과학자 사업이나 대덕의 사이언스 콘서트처럼 좋은 시도들이 각자 존재합니다. 저는 이것을 개인의 열정에 기대는 단계에서 벗어나, 어느 지역에 가져다 놓아도 작동하는 하나의 구조로 다듬고 싶습니다. 은퇴한 과학기술인이 자기 전문성을 등록하면 지역의 현안과 연결되고, 그 결과가 다시 청소년 교육으로 흘러가는 선순환 구조 말입니다.

솔직히 이 일이 제 생애 안에 완성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HANA도 착수해서 원자로에 들어가기까지 16년이 걸렸습니다. 시작해 두면 누군가는 이어갑니다. 저는 첫 삽을 뜨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Q. 박사님의 인생 2막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문장이 될까요?

“성취의 언덕을 넘어, 함께 걷는 나눔의 평원으로 가는 길.”

언덕은 혼자 올라야 하고, 정상은 좁습니다. 평원은 함께 걸을 수 있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습니다. 저는 이제 그 평원 쪽으로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분께, 오늘 만난 과학자가 내일의 당신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꾼 과학자가 세상을 바꿀 당신을 만나 오늘 우리는 하나(HANA)가 됩니다.